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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은 사람 VS 피하고 싶은 사람

윤치영 입력 2026.10.16 09:52 댓글 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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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은 사람 VS 피하고 싶은 사람


대전에서 활동하는 최정규 회장을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최 회장은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모임만 마흔두 개라고 한다. 단체 모임까지 합치면 백 개가 넘는단다. 처음에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회원이 마흔두 명이라고요?”

아니다. 모임이 마흔두 개다.

보통 사람은 모임 서너 개만 있어도 날짜가 헷갈린다. 어디에 회비를 냈는지, 이번 주에 누구를 만나기로 했는지 가물가물하다. 단체 대화방 몇 개만 늘어도 휴대전화가 주인보다 바쁘다.

그런데 백 개가 넘는 모임이라니! 그분의 달력에는 날짜보다 사람 이름이 더 많이 적혀 있을 것 같다.

아침마다 조기축구를 하고, 길벗당구모임에도 나간다. 최강회, 김채아노래교실, 배호추모모임 등 활동하는 자리도 다양하다. 공을 차고, 당구공을 굴리고, 노래를 부르며 사람을 만난다.

우리는 하루 일정을 소화하지만, 최 회장은 하루에 여러 사람의 일상을 함께 살아가는 듯하다.

최근에는 하루 경조사비로 오백육십만 원을 지출한 날도 있었다고 한다. 내 귀로 듣고도 다시 계산하게 되는 액수다.

물론 인간관계를 지출액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각자의 형편에 맞게 마음을 전하면 된다. 내가 주목한 것은 그 돈이 찾아간 자리다.

누군가의 결혼식, 누군가의 장례식, 축하가 필요한 집, 위로가 필요한 사람. 그 많은 사람의 기쁨과 슬픔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경조사 봉투에는 돈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기쁜 일을 기억합니다.” “당신의 슬픔을 함께하겠습니다.”

그런 마음도 들어 있다.

사람은 어려울 때 누가 찾아왔는지 오래 기억한다. 정신없이 큰일을 치르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익숙한 얼굴이 서 있으면 얼마나 든든한가. 그날의 짧은 악수 한 번이 평소의 긴 인사말보다 깊이 남기도 한다.

최 회장이 대전장애인총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가 쌓아 온 만남의 시간을 떠올렸다.

지지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직함을 내건다고 신뢰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다. 함께 웃고, 서로의 사정을 듣고, 필요한 날에 마음을 보탠 시간이 쌓여야 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당선이라는 결과지만, 그 뒤에는 수많은 만남과 발걸음이 있었을 것이다.

최 회장에게는 또 하나 놀라운 재주가 있다. 지금도 다리를 백팔십 도로 벌린다. 한국체육대학교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적지 않은 나이에도 몸의 유연함은 삼십 대 못지않다.

나는 웃으며 생각했다.

“이분은 인맥도 넓고, 다리도 넓게 벌어지는구나!”

보통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몸이 굳는다. 바닥에 떨어진 물건 하나 주우면서도 소리부터 낸다.

“아이고!”

양말을 신다가 잠깐 쉬기도 한다. 양말 두 짝 신는 데 전반전과 후반전이 필요하다. 그런데 다리를 백팔십 도로 벌린다니, 감탄이 나올 만하다.

그 유연함도 하루아침에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꾸준히 몸을 움직여 온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관계를 이어 가는 일도 마찬가지다. 한두 번 얼굴을 내미는 것으로 오래가는 신뢰를 얻기는 어렵다.

사람의 결과만 보면 신기하다. 과정을 들여다보면 이유가 보인다. 잘되는 데는 이유가 있고, 사람들이 찾는 데도 이유가 있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오늘 코칭 중에 전화가 왔다. 수업 중이라 받을 수 없어 바로 문자를 남겼다.

“지금 코칭 중입니다. 강의 끝나고 전화드리겠습니다.”

상황을 알렸으니 기다려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뒤, 그 사람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나는 잠시 문을 열고 사정을 설명했다.

“죄송하지만 지금 코칭 중입니다. 끝나고도 약속이 있어서 나가야 합니다.”

그러고는 다시 들어와 코칭을 이어갔다. 내 앞에는 시간을 예약하고 수업을 받으러 온 수강생이 있었다. 그 시간은 온전히 그 사람에게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코칭을 마치고 나오니 그는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과자를 먹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 대화를 나누는데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오다가 사 왔습니다.”

봉투 안에는 붕어빵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이어 용건이 나왔다. 대전에서 술을 만드는 회사의 홍보이사를 맡았다면서 거래처 두 곳을 소개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붕어빵은 두 마리인데, 부탁은 거래처 두 곳이구나.’

물론 붕어빵이 무슨 잘못인가. 빈손으로 와도 반가운 사람이 있고, 작은 먹거리 하나에도 고마운 마음이 든다.

내가 불편했던 것은 코칭 중이라고 알렸는데도 찾아온 태도였다. 곧 나가야 한다고 설명했는데도 기다리다가 자기 부탁을 꺼내는 모습이었다.

더구나 예전에 그가 알려 준 근무처에 연락했다가 재직 여부를 확인하지 못해 거리를 두었던 일이 있었다. 내게는 신뢰가 충분하지 않은 관계였다. 그런 상황에서 거래처 소개까지 부탁하니 부담이 앞섰다.

그와 관련해서는 이런 기억도 있다.

한번은 저녁 초대를 받았다. 장소는 팔천 원짜리 한정식 뷔페였다. 그곳에서 족발을 시켜 놓고 대접이라고 했다. 솔직히 저녁 초대라는 말에 기대했던 자리와는 거리가 있어 조금 궁색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나를 생각해 마련한 자리라 여기며 고마운 마음으로 식사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자 이런 말이 나왔다.

“1차는 내가 샀으니 2차는 당신이 사세요.”

어이가 없었다. 서로 기분 좋게 한 번씩 대접할 수는 있다. 하지만 초대한 자리에서 다음 비용을 당연하다는 듯 떠넘기니 마음이 상했다. 결국 실랑이 끝에 언성을 높이고 돌아왔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앞서 받은 대접까지 계산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고맙게 받아들이려던 저녁이 뜻밖의 청구서로 돌아온 셈이었다.

명함에 적힌 근무지가 서울 여의도라고 해서 처신까지 세련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품격은 주소나 직함보다 함께 있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또 한번은 아버지 팔순잔치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축하하는 마음으로 행사장에 3단 화환을 보내려는데, 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그곳에 그런 행사가 없다고 합니다.”

이상해서 당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인척들의 반대로 잔치는 취소했고, 친구들끼리 모여 저녁 식사만 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행사는 사정에 따라 취소할 수 있다. 가족끼리 의견이 달라 계획을 바꿀 수도 있다. 다만 이미 초대한 사람들에게는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집안 사정으로 잔치를 취소했습니다.” “친구들끼리 식사하는 자리로 바뀌었으니 괜찮으시면 오십시오.”

그 정도 설명이면 충분했을 일이다.

그런데 내가 먼저 확인하기 전까지 아무런 안내가 없었다. 이후에도 그 일에 대한 사과나 별도의 설명을 듣지 못했다. 그러던 중 뒤늦게 결혼하게 되었다며 청첩장이 왔다.

축하할 소식인데도 마음이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지난번에 축하하려던 내 마음과 수고를 그가 헤아렸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말이 나온 김에 또 하나 떠오른다.

이십 년 동안 연락이 없던 지역사회 지인이 아들 결혼 소식을 전해 오는 경우다. 자녀의 혼사를 앞둔 부모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오랜 인연이 생각나 소식을 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안부 한 번 없이 긴 세월을 건너온 연락이 경조사 안내라면 받는 사람은 난감하다.

‘내가 그리웠던 것일까. 축의금 봉투가 필요했던 것일까.’

반대로 자기 집안의 대소사를 앞두고는 모임에 열심히 나오다가, 행사가 끝나면 발길을 끊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경사와 애사에는 사람들을 불러 놓고, 다른 사람의 차례가 되면 모습을 보기 어렵다.

세상 참 요지경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렇다고 받은 만큼 정확히 돌려주며 살자는 뜻은 아니다. 사람마다 형편이 다르고 참석하지 못할 사정도 있다. 서운한 것은 자기 일이 끝난 뒤에는 상대를 잊어버리는 태도다.

고마웠다면 고맙다고 전하고, 계획이 바뀌었다면 설명하고, 함께하지 못하면 안부라도 묻는 것. 관계를 이어 주는 것은 그런 작은 행동들이다.

사람을 많이 만난다는 사실만으로 좋은 관계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어떻게 만나고, 만난 뒤에 어떻게 대하느냐가 중요하다.

상대가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내 부탁을 감당할 여유가 있는지, 거절하기 어려워 억지로 웃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

친하다는 이유로 이 과정을 생략하면 관계가 거칠어진다.

“우리 사이에 뭘 그런 걸 따져?”

그 말이 나오려 할 때 자신에게 먼저 물어야 한다.

‘혹시 내가 편하자고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친한 사이일수록 약속을 잡고 방문하면 좋다. 부탁할 때는 용건과 필요한 도움을 설명하고, 상대가 어렵다고 하면 물러설 줄 알아야 한다.

“오늘은 시간이 안 되시는군요. 다음에 시간 괜찮으실 때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돌아가는 사람을 보면 오히려 마음이 움직인다.

‘저 사람 일은 내가 한번 알아봐 줘야겠구나.’

상대의 사정을 헤아리고 선택할 여유를 주면 부탁도 편하게 듣게 된다.

특히 거래처 소개는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전화번호 하나 건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소개하는 사람의 이름과 신뢰도 함께 따라간다.

“윤 박사가 소개한 사람이니까 한번 만나보자.”

상대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 소개를 부탁받으면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제안을 하려는지, 소개받을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는지 살펴야 한다.

잘 모르는 일을 덜컥 연결했다가 문제가 생기면 오랫동안 쌓아 온 관계까지 흔들릴 수 있다. 그래서 때로는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일의 내용을 더 알아야 소개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제가 연결해 드리기 어렵겠습니다.”

분명한 거절도 관계를 지키는 말이다.

나는 스피치를 지도하면서 말의 기술을 가르친다. 그러나 기술보다 먼저 살피는 것은 태도다.

상대가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는가. 질문을 제대로 듣는가. 상대의 상황에 맞게 말하는가. 받은 호의에 감사할 줄 알고, 약속이 바뀌면 설명할 줄 아는가.

말을 유창하게 해도 자기 사정만 밀어붙이면 대화가 버거워진다. 조금 서툴게 말해도 상대를 살피면 마음이 열린다.

우리는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방문을 받아 주고 모든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의를 갖추면서 내 수업과 약속을 지킬 수 있다. 사정을 듣되 감당하기 어려운 부탁은 거절할 수 있다.

억지로 받아 주며 불만을 쌓기보다 가능한 일과 어려운 일을 차분히 밝히는 편이 서로에게 좋다.

그리고 나 자신도 돌아볼 일이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부담스러운 방문객은 아니었는지, 친하다는 이유로 설명을 생략하거나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았는지 살펴야 한다. 서운함을 전할 때도 감정에 앞서 내 사정을 차분히 설명했는지 돌아보게 된다.

기왕이면 사람들이 기다리는 사람이 되자.

“또 왔네.”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셨네! 반갑습니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게 되는 사람.

그 반가움은 직함이나 선물의 크기로 얻어지지 않는다. 평소에 상대의 말을 얼마나 귀담아들었는지, 약속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필요한 순간에 어떤 마음을 보탰는지가 쌓여 만들어진다.

평소에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함께 들어오는 것이다.


글/화술경영가 윤치영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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