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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적 철수' 하지 마라

윤치영 입력 2026.11.03 11:38 댓글 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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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적 철수' 하지 마라


젊을 때 몸은 "아프면 회복하려 든다.”

그러나 고령의 어느시점 이후, 

몸은 이렇게 판단한다.

“이제 회복할 필요가 없다.” 

이를 의학에서는 '생리적 철수'라 부른다.

“이제 다 살았지 뭐.”

나이가 들면 무심코 하는 말이다. 몸이 예전 같지 않을 때, 계단 몇 칸에 숨이 찰 때, 아는 사람 이름이 혀끝에서 맴돌 때 툭 던진다.

그런데 이상하다. 다 살았다는 사람이 다음 날 비가 온다니 골프 약속부터 걱정한다. 더는 바랄 게 없다던 사람이 손주 합격 소식에는 누구보다 크게 웃는다.

다 산 것이 아니다. 아직 기다리는 일이 있고, 마음이 먼저 달려가는 곳이 있다.

어쩌면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나이를 먹는 일만이 아니다. 살아 있는 자신에게 너무 일찍 폐업 안내문을 붙이는 일이다.

“나는 이제 쓸모가 없어.”

“이 나이에 뭘 새로 하겠어.”

“그냥 조용히 지내다 가야지.”

겸손처럼 들리지만, 자꾸 되풀이하면 하루의 선택이 달라진다. 나갈까 하다가 눕고, 전화할까 하다가 미루고, 배워볼까 하다가 돌아선다. 그렇게 생활에서 하나씩 빠져나오다 보면 어느새 달력에 병원 가는 날만 남는다.

병원 약속도 소중하다. 그러나 달력에 나를 치료해 줄 사람만 있고, 나를 기다려 줄 사람이 없다면 조금 서글프지 않은가.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보자.

퇴직 후 부쩍 말수가 줄어든 한 남자가 있었다. 아침을 먹으면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점심을 먹고도 그 자리였다. 저녁이면 한숨을 쉬었다.

“내가 이제 할 일이 뭐가 있겠어.”

아내가 산책을 권하면 무릎이 아프다고 했다. 친구를 만나라고 하면 만나봐야 다 옛날이야기라고 했다. 취미를 가져보라고 하면 이 나이에 배워서 어디에 쓰느냐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생 손자가 찾아왔다.

“할아버지, 학교에서 발표해야 하는데 좀 도와줘.”

남자는 손사래를 쳤다.

“요즘 학교 공부를 내가 뭘 안다고.”

손자가 말했다.

“공부 말고. 우리 반에서 제일 오래 살아본 사람한테 물어보래.”

남자가 허리를 폈다.

“그거라면 내가 전문가이지.”

발표 주제는 ‘우리 동네의 옛 모습’이었다. 남자는 서랍에서 사진을 꺼냈다. 지금 아파트가 들어선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 시장 골목에서 무엇을 팔았는지 이야기를 풀었다. 손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받아 적었다.

다음 날부터 남자는 바빠졌다. 사진을 더 찾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오래된 간판을 확인했다. 손자에게 설명하려니 자신도 다시 알아봐야 했다.

며칠 뒤 아내가 물었다.

“당신, 무릎 아프다더니 어디 가요?”

남자가 신발 끈을 묶으며 대답했다.

“현장 확인하러. 발표 자료가 부정확하면 안 되잖아.”

무릎이 기적처럼 나은 것은 아니다. 걸음을 재촉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진짜 반전은 그다음이었다. 손자의 발표가 끝난 뒤에도 남자는 자료를 계속 모았다.

“학교 숙제는 끝났잖아요?”

아내의 말에 남자가 대답했다.

“학교 숙제는 끝났어도 내 이야기는 안 끝났지.”

얼마 전까지 다 살았다던 사람이 다음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이 장면에 평생현역의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거창한 직함을 끝까지 붙잡는 것만이 현역은 아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오늘 누군가에게 건네는 사람, 내일을 위해 오늘 무언가를 준비하는 사람도 현역이다.

물론 마음먹는다고 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픈 사람에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낫는다”고 쉽게 말해서도 안 된다. 병에는 치료가 필요하고, 지친 몸에는 휴식과 돌봄이 필요하다. 회복이 더디다고 의지가 부족한 사람으로 몰아붙일 수도 없다.

다만 치료받으며 살아가는 하루에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작은 자리는 남아 있을 수 있다.

오늘은 창문을 열어 햇볕을 쬐는 일.

안부가 궁금한 사람에게 먼저 전화하는 일.

몸이 허락하는 만큼 걷는 일.

내가 아는 것을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일.

그 작은 행동들이 하루에 표정을 만든다.

필자의 직업은 말을 가르치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사람이 자신에게 어떤 말을 건네는지 자주 살피게 된다.

“나는 끝났어.”

이 말에는 다음 장면이 없다. 문이 닫힌다.

그러나 말을 조금 바꾸면 이야기가 이어진다.

“예전처럼은 어렵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건 있겠지.”

이 말에는 여백이 있다. 찾아볼 일이 남고, 시도할 길이 열린다.

“나는 할 수 있다”는 말도 무조건 크게 외친다고 힘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 뒤에 작은 행동 하나가 붙어야 한다.

“오늘은 십 분 걸어보자.”

“친구에게 안부부터 물어보자.”

“모르는 것은 한번 배워보자.”

긍정은 현실을 못 본 척하는 태도가 아니다. 달라진 현실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몫을 찾아내는 태도다.

나이가 들수록 할 수 없는 일을 세는 데는 능숙해진다. 그러나 아직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데는 의외로 인색하다.

빨리 달리기는 어려워도 천천히 걸을 수 있다.

큰 강당에서 강의하기는 부담스러워도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다.

새로운 기술은 서툴러도 오랜 경험에서 얻은 판단을 나눌 수 있다.

도움을 받는 날에도 인사를 건넬 수 있고,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쓸모를 증명하지 못하는 날에도 사람의 가치는 줄어들지 않는다. 평생현역은 쉬지 말라는 채찍이 아니다. 자기 삶에서 자신을 지우지 말자는 다짐이다.

나는 앞으로도 내 달력에 작은 약속을 적고 싶다. 가르칠 사람, 배울 일, 걸어볼 길, 함께 웃을 사람을 남겨두고 싶다.

아침에 눈을 떴다면 이렇게 물어보자.

“오늘은 무엇을 해볼까?”

“오늘은 누구와 한마디 나눠볼까?”

대단한 대답이 없어도 좋다. 커피 한 잔을 정성껏 내려 마시는 것으로 시작해도 된다. 그 한 잔을 마시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 수 있다면 더 좋겠다.

“별일 없지?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그 짧은 말이 나와 상대의 하루를 함께 깨울지도 모른다.

인생의 마지막 장을 미리 써놓지는 말자.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도 있고, 해보지 못한 일도 있고, 나눠주지 못한 이야기도 남아 있다.

“이제 다 살았지 뭐.”

그 말이 입에 맴돌거든 한번 고쳐 말해보자.

“오늘도 살 일이 있네.”

그리고 내일 약속 하나를 잡자.

다 살았다고 하기에는, 내일 해볼 일이 하나 생겼다.


화술경영가 윤치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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