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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를 이어가는 어른

한빛국제뉴스 입력 2026.08.18 19:11 댓글 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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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만학도 한 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맛있는 복숭아가 생겼는데 꼭 드리고 싶습니다." 그 한마디가 마음을 먼저 흔들었다.
전철을 타고 오셨다. 한 손에는 작은 상자 두 개, 다른 손에는 커다란 상자 하나. 하필이면 에스컬레이터마저 멈춰 긴 계단을 오르셨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 여린 어깨와 바삐 옮겼을 발걸음이 눈앞에 그려졌다.


나는 한참 동안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내가 무엇이라고, 이 먼 길을 그렇게 달려오셨을까. 잠시도 폐를 끼치기 싫다며 바람처럼 돌아서는 뒷모습은, 지쳐 있던 내 마음 깊은 곳에 말없이 위로를 심어 주었다.


그 다음 날 하늘에는 선명한 무지개가 얼마나 오래 떠있었는지.
문득 생각했다. 사람은 말보다 뒷모습으로 오래 기억되는 존재라는 것을.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무지개처럼 환히 비추는.
물소리 거센 하천 길을 달리는데, 빗길 위로 올라온 지렁이들이 사람들의 발길에 밟혀 있었다. 작은 생명 하나에도 마음이 저려 왔다.

 인생은 어쩌면 서로를 스쳐 지나가지만, 누군가의 아픔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마음 때문에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어제는 십수 년 전 처음 만났던 남편의 교회 형님 부부를 다시 뵈었다. 얼굴이 파킨슨병은 굳어져 웃을 수 없다 하셨지만 난 굳은 표정속에 담긴 형님의 따스함을 깊이 느낀다.


그때의 형님은 누구보다 건강했고, 반듯하게 두 아들을 키워낸 든든한 가장이었다. 그러나 2020년, 내가 투병을 시작하던 무렵 형님은 파킨슨병 진단을 받으셨다.


병문안을 오셨던 날,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섬겼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신 걸까요?" 비애가 어린 그 한마디를 형님은 잊지 않으셨나보다.



세월은 병을 더 깊게 만들었다. 몸은 점점 느려졌지만, 영혼은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형님은 시를 쓰고 글을 쓰며 아픈 사람들의 영혼을 품고 사랑하며 삶을 품어내셨고, 부모님은 치매로 삶의 환경은 더 힘겨워지셨다. 아내 영란 약사님은 가장이 되어 가정을 든든히 지켜내고 계셨다.


누군가는 말했다. "남편이 저렇게 힘든데 어떻게 저렇게 밝게 웃고 다니지?"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웃음은 아픔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픔을 사랑으로 견디어 낸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라는 것을.


함께 식사를 하는 내내 마음은 참 편안했다. 걸리는 것도, 억지스러운 것도 없었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형님은 조용히 말씀하셨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힘을 얻는다면, 그것으로 내 삶은 충분히 보람 있지."

그리고 덧붙이셨다. "호롱불이 마지막 기름까지 다 태워 소진하듯, 이쪽방에서 훌쩍 건너방으로 옮겨가듯, 주님이 부르시면 평안히 가면 되는 거지."
그 말씀을 하시는 두 분의 얼굴은 마치 해를 품은 사람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두 분이 떠나신 뒤에도 내 마음에는 오래도록 등불 하나가 켜져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혼탁하다고 말하지만, 그 속에는 묵묵히 사람을 살리는 어른들이 있다. 곁에 있기만 해도 위로가 되고, 뒷모습만으로도 삶을 가르쳐 주는 사람들.


나도 그런 어른으로 늙어가고 싶다.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 불을 밝혀 주는 사람, 세대와 세대를 잇는 다리가 되어 주는 사람.
좋은 어른은 나이를 먹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품어내며 살아낼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임을 오늘 다시 배운다.

흐린 하늘 사이 구름도 흐른다. 나도 흐른다.


글/김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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