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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존여비 4행시'의 의미는?

윤치영 입력 2026.10.09 09:58 댓글 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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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존여비 4행시'의 의미는?


요즘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 ‘뷰’를 따진다. 예전에는 커피를 마시러 갈 때 이렇게 물었다.

“거기 커피 맛있어?”

요즘은 질문 순서가 바뀌었다.

“거기 뷰 좋아?”

커피가 조금 싱거워도 강물이 진하게 흐르면 괜찮고, 커피가 조금 써도 노을이 달콤하면 용서가 된다.

강을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 한 잔. 바다를 바라보며 즐기는 저녁 식사.

커피 맛에 강물이 흐르고, 저녁 식탁에 노을이 내려앉는다. 같은 커피도, 같은 음식도 풍경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듯하다. 생각해 보면 신기하다. 강물이 커피잔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노을을 반찬으로 집어 먹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기분이 좋아지면 혀도 덩달아 너그러워진다.

“이 집 커피 괜찮네.”

커피가 괜찮은 건지, 창밖이 괜찮은 건지 조금 헷갈린다. 그렇지만 뷰가 좋은 곳은 맛도 좋다.

커피는 한 잔인데 즐기는 것은 여러 가지다. 강물 한 모금, 햇살 한 모금, 여유 한 모금...

문제는 그 여유를 나만 즐기고 싶은 게 아니라는 데 있다. 전망 좋은 카페에 가면 창가 자리는 이미 만석이다. 그중 한 사람은 커피도 다 마셨다. 컵 바닥이 훤하다. 그런데 일어날 기미가 없다. 속으로 생각한다.

‘다 마셨으면 좀 일어나시지.’

그러다가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

나도 안 일어난다. 커피는 다 마셨지만 강물은 아직 다 못 봤기 때문이다. 사람이 참 재미있다. 남이 오래 앉아 있으면 자리 독점이고, 내가 오래 앉아 있으면 여유 있는 휴식이다. 창밖은 같은데 해석은 주인 따라 달라진다.


호텔에서도 뷰는 중요하다.

“방에서 바다가 보이나요?”

“네, 오션뷰입니다.”

그 말에 마음이 움직인다. 그런데 막상 커튼을 열어보니 바다가 잘 안 보인다.

창가에 바짝 붙어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몸을 조금 기울여야 저 멀리 파란 조각이 나타난다.


집을 장만할 때도 묻는다.

“앞이 탁 트였나요?”

“산이 보이나요?”

“강이 보이나요?”

집 안의 구조만큼 집 밖의 풍경을 따진다. 이쯤 되면 우리는 집과 함께 매일 바라볼 세상의 한 조각을 고르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뷰는 무엇일까?

강일까, 바다일까, 도시의 야경일까?

필자가 유난히 좋아하는 뷰는 높은 곳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풍경이다. 산 아래에서는 능선이 앞을 가로막는다.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한 걸음씩 올라 정상에 서면, 앞을 막던 산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된다.

골목에서는 복잡하던 도시도 높은 곳에서 보면 다르게 보인다. 뒤엉켜 있던 길이 이어지고, 빽빽하던 건물 사이로 나무와 공원이 눈에 들어온다.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던 연결이 위에서는 보인다. 물론 그 좋은 뷰를 만나러 가는 길은 만만치 않다. 출발할 때는 씩씩하다.

“오늘은 가볍게 몸 좀 풀고 오지.”

십 분 뒤에는 몸보다 입이 먼저 움직인다.

“아직 멀었어요?”

이십 분 뒤에는 봉우리만 나타나면 묻는다.

“저기가 정상이죠?”

삼십 분 뒤에는 철학이 등장한다.

“인생이 꼭 정상까지 가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조금 전까지 등산객이었는데 갑자기 사상가가 된다.

‘목표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중간에서 즐기는 것도 지혜다.’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다 좋은 말이다. 그런데 왜 이런 깨달음은 꼭 숨이 턱에 찼을 때 찾아오는 것일까?

함께 가는 사람이 말한다.

“조금만 더 가면 돼요.”

등산에서 ‘조금’은 거리 단위가 아니다. 앞서가는 사람의 희망 사항일 때가 많다. 내가 생각하는 조금은 오 분인데, 그 사람이 말하는 조금은 능선 두 개를 더 넘는 것이다. 게다가 앞서가는 사람은 숨도 안 찬다. 설명도 잘한다.

“저 산이 어디고, 저 능선이 어디고…”

나는 속으로 대답한다.

‘산 이름은 나중에 듣겠습니다. 지금은 제 숨부터 찾아야겠습니다.’

그렇게 오르다가 마침내 시야가 확 트인다. 바람이 불어온다. 산이 겹겹이 펼쳐지고, 강이 굽이쳐 흐르고, 마을이 작게 내려다보인다. 그 순간에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야, 좋다!”

조금 전까지 정상에 집착하지 말자던 사람이 이제는 말한다.

“올라오길 잘했네!”

철학도 전망 따라 바뀐다. 다리는 고생했는데 눈이 호강한다. 등줄기에 맺힌 땀을 바람이 식혀준다. 내려다보니 내가 올라온 길도 보인다.

저 굽이에서 쉬었고, 저 바위에서 물을 마셨고, 저쯤에서 돌아갈까 고민했다.

‘내가 저 길을 올라왔구나.’

풍경에 내 수고가 더해지는 순간이다.


인생에도 이런 뷰가 있다. 한창 겪을 때는 벅차기만 했던 일이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내가 걸어온 길이 된다. 당시에는 보이지 않던 굽이가 보이고, 고비마다 나를 도와준 사람도 떠오른다.


강의와 코칭 현장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만난다. 처음에는 자기소개 한마디를 꺼내기 어려워하는 사람이 있다.

“선생님, 저는 원래 말을 못해요.”

머릿속에는 할 말이 많은데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오히려 말을 붙잡는다. 그래서 한 문장부터 시작한다. 조금 서툴러도 말해보고, 막히면 다시 해본다. 그렇게 연습하다가 어느 날은 앞에 나와 자기 이야기를 끝까지 해낸다.

“제가 이걸 했네요?”

본인도 놀란다. 처음에는 높아 보이던 발표대가 이제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됐다. 말을 마치고 돌아오는 얼굴에는 안도와 기쁨이 함께 있다. 나는 그 표정을 참 좋아한다. 스스로 넘은 고개가 있는 사람의 얼굴이다. 그런 얼굴을 보고 있으면 생각한다.

‘사람이 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참 좋은 뷰구나.’

그런데 여기까지 읽으신 독자께서 물을 수도 있겠다.

“윤 박사님, 더 기막힌 뷰는 없습니까?”

있다. 부부 사이의 짓궂은 농담을 살짝 보태자면, 잠자리에서 사랑하는 아내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순간도 빼놓을 수 없지 않은가?

잠깐, 놀라지 마시라. 산 정상까지 따라오셨는데 갑자기 침실로 모셨다. 마음의 등산화를 벗을 시간도 드리지 못했다. 이쯤에서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헛기침하고, 누군가는 괜히 물을 한 모금 마실 것이다. 그런데 그 뷰가 정말 좋으려면 조건이 있다. 아내도 나를 보며 웃고 있어야 한다. 나 혼자만 좋다고 감탄하는 것은 전망 감상일 수 있어도, 함께 나누는 행복이 되기는 어렵다. 아무리 멋진 호텔이라도 둘이 다투고 들어가면 오션뷰가 무슨 소용인가. 남편이 말한다.

“여보, 바다 좀 봐. 정말 좋다.”

아내가 대답한다.

“당신은 참 좋겠네.”

이때는 바다 감상을 잠시 멈춰야 한다. 창밖의 파도보다 방 안의 기류가 급하다. 창밖에는 잔잔한 바다, 방 안에는 높은 파도.

같은 방에서 서로 다른 바다를 보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남존여비’를 엉뚱한 사행시로 비틀어보자.

남 — 남자의

존 — 존재 이유는

여 — 여자의

비 — 비명을 듣기 위해서?!

서로 사랑하며 터뜨리는 행복한 환호를 뜻하는 장난스러운 말이다. 그런데 아내가 이렇게 받아칠 수도 있다.

“좋아요. 오늘은 설거지부터 해봐요. 내가 환호해 줄게요.”

환상적인 전망을 이야기하다가 순식간에 싱크대 앞으로 이동한다.

쌓인 접시, 냄비, 수저.

이것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뷰다. 다만 감탄보다 한숨이 먼저 나올 수 있다.

산에서는 올라가느라 땀이 나고, 집에서는 미뤄둔 일을 들켜서 진땀이 난다. 그래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해보면 안다. 싱크대가 깨끗해지고, 식탁이 정리되면 눈앞도 마음도 조금 시원해진다. 그때 아내가 말한다.

“어머, 웬일이야?”

칭찬 같기도 하고 반성문 제목 같기도 하다. 평소에 얼마나 안 했으면 ‘고마워’보다 ‘웬일이야’가 먼저 나왔을까?

좋은 뷰를 보고 싶다면서 그 뷰를 만드는 일에는 인색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아내의 환한 얼굴을 보고 싶다면, 그 얼굴이 환해질 일을 내가 먼저 해보면 된다.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이야기를 듣는 것. 무거운 짐을 받아 드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부탁받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 것. 그리고 말 한마디를 보태는 것이다.

“오늘도 수고했어요.”

“그건 내가 할게요.”

“당신 생각은 어때요?”

이런 말은 돈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가까운 사람에게 건네려면 뜻밖에 연습이 필요하다. 밖에서는 친절한 사람이 집에서는 퉁명스럽기도 한다. 손님에게는 웃으면서 가족에게는 인상을 쓴다.

“가족이니까 편해서 그렇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내가 편하다고 상대도 편한 것은 아니다.

내가 아무렇게나 던진 말 때문에 상대의 표정이 굳었다면, 집 안의 풍경을 흐린 사람은 나일 수도 있다.


필자는 늘 말한다. “말문이 열리면 관계가 풀리고, 일이 풀리고, 인생이 풀린다.”

그 말은 강의실에서만 통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식탁에서도, 거실에서도, 둘이 걷는 산책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왜 그래?” 대신 “무슨 일 있었어요?”라고 묻고, “그걸 꼭 말해야 알아?” 대신 “다음에는 내가 먼저 챙길게요”라고 말해보자.

대화가 조금 편안해지면 마주 보는 얼굴도 달라진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뷰는 무엇일까?

강이 보이는 카페도 좋다. 바다가 펼쳐진 호텔도 좋다. 땀 흘려 오른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더없이 시원하다. 그런데 그 모든 곳에서 우리는 자꾸 누군가에게 말을 건넨다.

“저기 좀 봐.”

“정말 좋지?”

“우리 여기 오길 잘했네.”

혼자 감탄하다가도 함께 바라볼 사람을 찾는다. 눈앞의 풍경을 나누고 싶은 것이다. 내가 가리킨 곳을 함께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풍경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훗날 사진을 꺼내볼 때도 산과 바다만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그날 함께 웃었던 사람, 나눴던 이야기, 손에 쥐여주던 따뜻한 커피가 함께 떠오른다. 그래서 필자가 고른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뷰는 좋은 풍경 앞에서 함께 웃는 사람의 얼굴이다.

내 곁에서 편안하게 웃는 아내의 얼굴. 말하기를 두려워하던 수강생이 발표를 마치고 환하게 웃는 얼굴. 함께 산을 오른 벗이 땀을 닦으며 “좋다!” 하고 감탄하는 얼굴. 그 얼굴들을 보면 나도 웃게 된다.


오늘은 좋은 뷰를 찾아 나서도 좋고, 가까운 곳에서 잠시 쉬어도 좋겠다. 다만 창밖을 본 뒤에는 곁에 있는 사람의 얼굴도 한 번 바라보자. 그리고 이렇게 말해보자.

“당신하고 같이 보니까 더 좋네.”

혹시 아내에게 조금 더 멋지게 말하고 싶은 분이 계신가?

“여보, 당신이 내 인생 최고의 뷰야.”

좋다. 다만 아내가 장바구니를 양손에 들고 있다면 먼저 짐부터 받아 드시라. 안 그러면 이런 대답이 돌아올 수 있다.

“그 좋은 뷰, 팔 빠지겠어요.”

그럴 때는 얼른 짐을 들자. 말로만 감상하지 말고 두 손으로 거들자. 그러고 나서 마주 보는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면, 오늘 최고의 뷰는 이미 만난 것이다.


글/화술경영가 윤치영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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