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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풍금

김영란 입력 2026.10.07 10:12 댓글 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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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마음의 풍금이 울리는 날

아가 곁에 누워 새근새근 잠드는 숨소리를 듣고 있으면 가슴 깊은 곳에서 감흥이 조용히 춤을 춘다. 작은 몸 하나가 이불 속에서 바시락바시락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제법 문맥이 맞는 말을 불쑥불쑥 쏟아낸다.

그 말 한마디에 웃음이 터지고, 무언가를 묻고 대답하고 눈빛으로 마음을 주고받는 스물두 달 아가새를 바라보며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무한한 상상력의 시작을 본다. 소변과 대변을 가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도 참으로 신비롭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이 또 다른 작은 생명.

웃음을 자아내다가 문득 “행복해?” 하고 되묻는 총총한 아가별. 그 순간 내 안의 시간도 잠시 멈춘다. 다시 살아서 볼 수 있고, 다시 태어나듯 새로운 하루를 느낄 수 있으니 어찌 감정의 물결이 출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살아 있다는 것은 어쩌면 매일 조금씩 다시 태어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섭섭한 마음이 올라올 때면 나는 마음에 쉼표 하나를 찍는다. “너, 섭섭했구나.” “인정받고 싶었구나.” 마음속에서 일어난 감정에게 그 이름을 가만히 불러주고 나면 신기하게도 소용돌이가 잦아든다.

감정은 없애야 할 것이 아니라 들여다보고 이름 붙여주어야 하는 마음의 흔적. 그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 아래에 숨어 있던 욕구의 빛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아, 내가 이것을 원했구나. 아, 내 마음은 이것을 필요로 했구나.

그렇게 마음 한 자락을 쓰다듬고 나면 어느새 가슴에 환한 기운이 감돈다. 감정의 소용돌이를 지나 욕구의 빛을 찾아가는 길. 요즘 나는 그 길 위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다.

학교 수업을 하러 올라가는 길. 시월의 길목에 나뭇잎은 가볍게 흩날리고 군더더기 하나 없는 햇살이 차창과 마음 위에 투명하게 내려앉았다. 구름 한 점까지도 맑은 하늘.

우송대학교 운동장에서는 파크골프를 하며 온몸으로 열망을 표출하는 사람들의 몸짓이 가을 햇살 속에서 눈부셨다. 한참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참, 저분들은 좋은 날을 사는구나.

삶을 노래하듯 움직이고 오늘이라는 시간을 온몸으로 누리는 사람들. 그 풍경을 바라보는 내 마음에도 가을바람 한 줄기가 스며들었다.

건양대학교 특강이 있어 사학의 집결지에 들어서니 젊은 학생들의 숨결이 푸르다. 일찍 도착해 한참을 앉아 있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풋풋한 청년들의 에너지가 좋고 그 생생한 기운 속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의 풍금이 다시 울린다.

나는 역시 천상 교육자인가 보다. 교육할 때 가장 행복하고, 가르치는 순간 가장 깊은 곳의 내가 채워진다. 교육이라는 공기. 교육이라는 삶의 배열. 교육이라는 인생의 채색. 그 무엇보다 나를 안정시키고 충만하게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피어나는 배움의 순간이다.

한 사람의 눈빛이 달라지고, 한 사람의 마음에 작은 질문 하나가 피어나고, 어제와 다른 생각 하나가 마음에 머무는 순간. 그것을 바라보는 일이 내게는 참으로 아름답다.

평생을 교육이라는 서사시로 살아왔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이야기를 건네고 또 수많은 마음을 들여다보며 내 삶의 궤적 위에 교육이라는 문장을 한 줄 한 줄 수놓아왔다.

돌이켜보면 내가 걸어온 길이 꼭 화려하지 않아도 좋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등불 하나 밝혀줄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저 감사하다. 그저 만족스럽다.

그리고 오늘 다시 확인한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생명과 사랑과 배움의 욕구를 충분히 살아내는 것임을.

가르치고, 배우고, 느끼고, 사랑하며 살아 있음의 감각을 온몸으로 누리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가장 깊은 실현이고 가장 아름다운 충족이다.

오늘도 커다란 숨을 깊이 내쉰다. 후우——

시월의 가을이 조금 더 깊어졌다. 나뭇잎 하나 떨어지는 소리에도 마음의 풍금이 울리고, 아가의 새근거리는 숨결에도 삶은 조용히 노래한다.

아, 살아 있어서 참 좋다. 오늘도 살아있음의 감사 한 모금.

글/김영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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